최대한 벌어서 최대한 돌려주는 명문가의 모습은?
대단한 ‘야심’에서 출발하여 훌륭한 ‘마무리’로 이룩한 명문가

록펠러 플라자, 뉴욕 맨해튼
록펠러 플라자, 뉴욕 맨해튼

최대한 벌어서 최대한 돌려준다

‘세기의 경매’로 이름 붙여진 ‘페기 & 데이비드 컬렉션’이 금년 5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시장을 뜨겁게 달궜다. 전체 작품 수 1550점, 예상 규모는 5억 달러(약 5300억 원)로 단일 소장품 사상 최대를 기록했으며, ‘록펠러 소장품’이란 이력 때문에 낙찰 규모는 이보다 훨씬 컸다(8,800억 원).

자선 경매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록펠러는 미국 최초의 억만 장자인 ‘석유왕’ 존 D 록펠러(1839~1037)의 막내 손자로 1981년까지 체이스맨해튼은행을 이끌었다. 그의 아버지 록펠러 2세는 고미술을, 어머니 애비 앨드리치는 현대미술을 애호했으며 MoMA(미국뉴욕현대미술관) 창립의 주역이다. 생전에 계획한 ‘기부 경매’를 실천에 옮기며 ‘최대한 벌어서 최대한 베푼다.’는 명문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예술품 컬렉션을 신분과 성공의 증표로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데 이용하지 않고 진정한 예술 사랑의 본보기가 되었다. 선대가 모은 걸 물려주지 않고 후대가 다시 수집을 시작한다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마무리 정신의 발로인 것이다.

명문가는 이처럼 크게 이룬 부를 뛰어 넘어 더 높게 빛나는 가치와 철학이 후대에 이르기 까지 계승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전파하고 있다. 진짜 부자는 가문 구성원의 더 많은 행복 추구를 최우선시 함으로서 정신적 요소 없이는 결코 재산을 오래 보존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부의 참다운 대물림이란 물적 재산에만 몰두하지 않고 인적 재산과 지적 재산까지 온전하게 이어지는 것이 정석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야망의 창업주 론 D 록펠러

150년 전통의 록펠러 가문의 출발점에는 창업주의 대단한 ‘야심’이 자리 잡고 있다. 록펠러는 성공하는 1등만 있을 뿐 성공하는 2등은 없으며, 1등을 향한 갈망 없이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결코 될 수 없다고 했다. 1등과 2등의 차이는 단순한 숫자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야심’의 차이라는 신념으로 가득했다. 그에게 ‘야심’은 실패를 일으켜 세우고 성공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게 만드는 ‘자신감’이란 정신적 가치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 그가 두려워 한 것은 금전적 손실이 아니라 정신적인 파산이었다.

세계 최고의 ‘석유 왕국’ 건설에는 ‘독점’이 합법이었던 시대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비결은 ‘가치 있는 상품은 반드시 높은 가격에 판다’는 가치투자의 확신에서 출발했다. 당시 소외받던 ‘석유’가 ‘산업의 혈액’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승승장구하던 곡물도매상에만 만족하지 않고, 신성장 동력의 새로운 아이템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재산을 보유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산 축적의 기회를 잡는 것이란 확신에서다. 기회를 포착했을 때라도 자신의 ‘투자관’이 시장의 법칙에 얼마나 잘 부합하느냐를 따졌으며 또한 적절한 타이밍 설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기회와 도전은 병존한다고 믿은 결과다.

물론 숱한 위기와 봉착하기도 했다. 1947년 해리 트루먼(Harry Truman)대통령 시절 석유 산업의 독점 금지 법안에도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당장은 어려워도 기회는 언제나 찾아 온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해 휴가 중 우연히 베네수엘라 정부가 자국의 석유 자원 개발과 관련한 외국 자본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본격 협상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미 진출해 있던 그의 회사가 자국 직원들을 부당하게 대우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에서 악명 높은 기업으로 불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감지했다.

그 해결책으로 자선 행사를 열어 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다. 당시 록펠러 2세는 이미 70세를 넘었으나 불과 닷새 만에 스페인어 연설문을 모조리 외어 행사장에서 100% 스페인어 연설로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당연히 이미지가 크게 개선되고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세계 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만들어 냈다. ‘적을 만들지 말고 친구를 만들어라’는 그의 사업 철학이 빛을 발했다. 이러한 위기 돌파력은 이어져 1931년 록펠러 3세가 불과 25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파업 사태를 원만히 수습했고 알래스카 자회사의 위기도 이겨내면서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발돋움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존경받는 부자로 남는 길

최근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부고 모음집(1851년 창간호~2016년)이 발간되었다. 그 속에는 정치, 경제, 문화계의 거물 160여 명의 부고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고인의 업적 칭송은 물론 잘못까지도 신랄하게 지적하여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석유왕 존 D 록펠러를 ‘미국 재계 신화의 훌륭한 본보기’라고 평가 하면서도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설립할 때 철도를 통한 리베이트로 부를 획득했으며, 사람을 매수해 경쟁사에 스파이를 심어 놓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록펠러 가문은 경제장부 못지않게 도덕장부에도 빈틈이 없다. 금은보화의 무게만큼 속 깊은 마음과 의로운 지혜의 묵직함이 가문을 채우고 있다. 그들의 마음속 풍경에서 그윽하고, 따스하며, 향기가 나는 떨림이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곽형두 머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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